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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배운 게 한’이라던 아버지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 시작한 영어 공부가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영어 칼럼니스트 우보현씨 이야기다.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하면 된다’는 진리를 깨달았다는 그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영어에 관심이 많다는 사람들 중에서 우보현씨(44)를 모르는 이는 드물다. 사람들은 그를 ‘영어를 쉽고 재미있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영어 칼럼니스트’라고 평한다. 그는 중앙일보, 매일경제, 스포츠월드에 영어 칼럼을 연재한 적이 있고, 현재 스포츠칸에 ‘우보현의 시네마 잉글리시’를 기고하고 있다.
“글 쓰는 게 좋아 각종 매체에 글을 썼어요. 아무래도 영어와 관련된 글을 쓰는 게 저의 천직인 것 같아요. 글 쓰는 순간이 가장 재미있고, 그 일이 가장 자신 있으니 말이에요.”
그는 「보보의 생생 영어 컬렉션」 「열심히 공부한 당신 떠나라」 같은 책도 펴냈다. 「열심히 공부한 당신 떠나라」는 출간 당시 큰 인기를 얻어 MBC에서 선정한 ‘화제의 책’으로 뽑히기도 했다. 생활 영어 강사로 방송에 출연한 적도 있는 그는 조만간 EBS 방송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촌놈, 비행기 타다 유학 마치고 엘리트로 돌아오리라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86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촌놈’ 우보현씨는 난생처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국비장학생 자격으로 미국 유학길에 나서는 참이었다. 당시 3백50명이 지원한 토플 시험에서 22등을 기록함으로써 그는 35등까지 선발되는 국비장학생에 들 수 있었다. 고졸 출신의 응시자가 국비장학생이 된 것은 국내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비행기에 오르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중에서도 어머니 생각이 간절했어요. 말썽 피우던 저 때문에 울면서 기도하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어요. 어머니는 미국 간다는 말에 ‘뱁새가 황새 쫓아가면 가랑이 찢어진다’고 하시면서도 제 손에 돈을 쥐어주셨어요. 어머니에게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리라 다짐했죠. 유학 마치고 한국에 돌아올 때는 꼭 엘리트가 돼 있을 거라고 말이에요.”
사실, 그는 공부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공부에 아무런 뜻도, 흥미도 없었다. 다른 형제들이 ‘수재’ 소리를 들어도 전혀 부럽지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을 다니다 그만둔 ‘야매’치과의사였다.
“아버지는 간경화로 마흔두 살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못 배워서 사람들에게 괄시를 받았다. 나는 내 아들이 나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아들이 공부로 인정받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라고 말이에요.”
아버지의 유언을 가슴 깊이 새겼다. 하지만 6년 동안 아버지 병원비를 대느라 집안 살림은 바닥났고 빚까지 있어 편안히 공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삼촌만 믿고 상경했다. 하지만 삼촌한테 신세를 질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나이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구두닦이와 막노동이 전부였다. 청계천의 수도 공구상에 취직해 파이프를 나르고, 공구를 조립하는 일을 하고 있을 때 기회가 찾아왔다.
“신문에 난 야간고등학교 학생 모집 광고를 본 순간 ‘이거다’ 싶었어요. 토목과에 원서를 넣었어요. 당시 주변 사람들은 ‘중학교 졸업도 못한 애가 어떻게 합격하겠느냐’며 비웃었죠. 그런데 토목과가 미달이더라고요. 원서를 넣는 순간 합격한 거죠(웃음). 주변 사람들에게는 2:1이라고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했어요. 미달이라고 하면 주변 사람들이 무시할 게 뻔했으니까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했다. 무척 고생스러웠지만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다. 아버지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힘들어도 참고 견뎠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그가 공부하는 걸 탐탁치 않게 여겼다. 특히 일하던 곳의 공장장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며 그가 학교 가는 걸 방해하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사람대접 받기 위해 무조건 공부 ‘영어에 미친 놈’이라 불려 그가 처음 영어를 접한 건 야간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영어 공부는 꼭 하라’던 삼촌의 말을 잊지 않고 영어 공부를 시작한 것. 영어 공부는 학교를 마치고 방위로 근무하는 동안에도 계속됐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가난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라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제대로 사람대접 받으려면 공부해야 한다고 수시로 최면을 걸었다. 주머니에 영어사전을 갖고 다니면서 틈날 때마다 봤다. 어느 순간 단어 암기 요령이 생기더니 그 뒤부터 영어 공부에 가속도가 붙었다.
“방위 근무를 마친 뒤 합판 가게에서 일할 때였는데, 트럭 기사들이 저를 보고 ‘미친 놈’이라고 불렀어요. 영어 공부에 미친 놈 말이에요. 그들은 영어 책을 보고 있는 저를 보며 ‘네가 영어를 어떻게 알아보느냐?’며 놀리곤 했어요. 그즈음 1년 가까이 독서실에 다니며 공부하기도 했죠.”
서울 힐튼호텔 공사 현장에 합판 배달을 간 적이 있다. 공사 현장 소장이 미국 사람이었는데, 그와 대화가 되는 게 아닌가. 본인은 물론이고 현장 소장, 주위 사람들까지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는 1980년대 초반이다. 우리나라에 미국인과 원활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정규 교육을 받지도 못한 합판 배달부가 미국인과 막힘없이 이야기를 나누니 신기할 수밖에.
그때부터 그는 휴일만 되면 외국인이 있을 만한 곳을 배회했다. 영어 회화를 위해서다. 이태원, 덕수궁, 탑골공원 같은 곳을 거닐다 외국인이 보이면 무조건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때는 외국인과 말이 통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 신기했다. 주변 사람들이 외국인과 대화하는 자신을 대단한 듯 바라보면 그게 또 뿌듯했다. 외국인이 알아듣지 못하면 종이에 써서 보여주기도 했다. 영어에 푹 빠져버린 것이다.
“영어에 재미가 붙기 시작하면서 언젠가는 미국에 가서 영어 공부를 하리라고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토플에 응시한 거죠. 가난한 저로서는 국비장학생만이 미국에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거든요.”
미국에 있는 동안 대학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고, 대학원에서는 언어학을 공부했다. 당시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CM방송의 DJ를 맡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를 재미교포로 착각할 정도였다니, 그의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쉽게 짐작이 간다.
“함께 미국에 간 유학생들은 현지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체를 했어요. 저는 그렇게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무조건 ‘Slowly’를 외쳤어요.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듣고 또 듣고, 모르면 수첩을 내밀어 적어달라고까지 했어요. 그렇게 현지인들을 귀찮게 한 결과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된 것 같아요(웃음).” 그렇다고 영어 공부하는 게 마냥 쉬웠던 건 아니다. 책을 집어던진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어머니를 떠올렸다. 자식 키우느라 갖은 고생 하시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중앙일보에 영어 칼럼 기고 영어 칼럼니스트로 유명세 떨쳐 10년 동안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영어 학원 강사를 하다 연세대학교와 경희대학교에서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당시는 외국에 유학 다녀온 사람도 많지 않을뿐더러 영어 회화를 잘하는 사람이 드물었다. “연세대학교 시간강사를 맡은 뒤 처음 교단에 섰는데 눈물이 나더라고요. 아버지 생각이 제일 많이 났어요. 남들이 직업을 물을 때 ‘대학 강사’라고 말할 수 있게 돼서 좋았고요. 비록 시간강사지만 말이에요. 구두닦이부터 시작해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제가 ‘대학 강사’라뇨. 제 자신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 그 자체였죠.”
1996년에는 울산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전임교수가 됐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보람찬 일이었다. 하지만 학교 내 다른 문제들 때문에 학교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사표를 던지고 학원 사업에 도전했다. 그동안 ‘영어 공부’라는 외길을 달린 그에게 학원 사업은 쉽지 않았다. 학원 사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학원 강사로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무작정 중앙일보사를 찾아갔다. 신문에 영어 칼럼을 연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앙일보사에서 그를 순순히 받아줄 리 없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 아들이 쓴 글이 실려 있는 신문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당시 칼럼니스트의 사진을 실어주는 곳이 중앙일보사뿐이었기 때문에 그곳을 찾아간 거죠. 서른 번 정도 찾아갔을 때 편집장이 저를 추천해주겠다고 했어요. 알려지지 않은 참신한 인물이 칼럼을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죠.”
당시 그와 함께 영어 칼럼니스트 후보로 오른 이는 곽영일, 오성식, 정철, 민병철 등 당대 최고의 영어 강사들이었다. 편집장은 그가 뽑힐 가능성은 5% 미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그가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것이다. 모두가 예상 밖의 결과에 놀랐다.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대학교수가 됐을 때보다 더 기뻤어요. 어머니께서 신문에 난 저의 글과 사진을 보고 좋아하실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중앙일보에 칼럼을 연재한 뒤부터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신문, 방송 할 것 없이 여기저기서 그를 찾기 시작했다. ‘영어 칼럼니스트 우보현’으로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어렵고 힘들던 시절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우보현씨를 ‘청계천의 전설’이라고 칭한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전화가 오기도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우보현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제가 이렇게까지 되지는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에게 정말 감사할 뿐이죠. 어머니는 제가 영어 칼럼니스트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고 꾸준히 활동하는 게 대단하다고 하세요. 빗나갈 수 있는 불우한 환경이었는데도 올곧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말씀하시죠. 어머니는 대기업에 다니는 형들보다 저에 대해 더 많이 자랑하세요. 어머니에게 작으나마 ‘행복’을 안겨드린 것 같아 좋아요. 아들로서 효도한 것 같기도 하고요.”
영어 칼럼을 통해 자신의 얄팍한 영어 지식을 전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하다는 우보현씨. 앞으로는 획기적인 칼럼을 많이 쓰려고 한다. “예순이 될 때까지 칼럼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는 “사람은 죽어도 책은 남을 것 아니냐”며 웃어 보였다. |